프로

┏ⓐ┳┳┳┳┳┓ 2013. 12. 19. 23:32








프로는 절대 변명하지 않는다..


변명하지 말고 무조건 최선을 다 할것..


변명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로 인해 생길지도 모르는


불이익까지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 하지 않으면 


내속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변명은 싫다..


일할 때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돌아오는 결과에 대해서는 혼자 참아내자..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나는 프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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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그랬다..


누군가가 보고싶으면 꼭 봐야만 했고..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휴대폰을 들어야 했다..


헤어짐엔 꼭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건 꼭 알아야만 했다..


알고나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람마음은 


노력하면 움직이는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지겹게도 


나를..


또 우리를..


괴롭혔나보다..


이제..


조금은 알것같다.


보고싶다고 다 볼수있는것은 아니며..


나의 사랑이 깊어도


이유없는 헤어짐은 있을수있고..


받아들일수 없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것이 있다는것을..


사람의 마음이란게


아무 노력없이도 움직일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움직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꼭 만나야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날수없는 사람도 있고..


만나서는 안되는 사람도 있다는것을..


기억속에 있을때 더 



아름다운 사람도 있다는 것을..


가을이 가면 겨울이오듯..


사람도..


기억도..


이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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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 2012

2012. 11. 2.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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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나 성급했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들에 대해..

원망했으며

반성하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그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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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후..


착각이었다고 느껴도..


잘못된판단이었다고 느껴도..


"그때는 내자신이 그렇게 믿었었기 때문에,결코 후회하지않는다"라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을만큼..


나는 나를 믿기 때문에..


나는 나를 진심으로 믿어주기 때문에..


내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기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나는 나를 사랑하기때문에..


나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기 때문에..


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기위해서


항상 웃게 하려고 노력하고..


내 자신에게 선물도 주는거야..


내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법과,


내가 나를 진심으로 믿어주는법을 알게되기까지..


오랜시간과 시행착오의 시간들이 필요했던것 같아..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


남들도 나를 사랑할수있게됨을 몰랐어..


내가 나에게 사랑받아야..


남들에게도 사랑받을수 있음을 몰랐어..


그렇게 사랑하는방법과 사랑받는방법을 모르던나는..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기만 하면


도망가버렸고 숨어버렸었어..


난 나를 사랑하는법을 몰라서..


나를 상처받게 내버려뒀고,


상처받은 마음을 혼자서 견디게 했었고,


힘들어도 울지도 못하게 했고,


아파서 열이 나도 이악물고 참으라고 했어..


여행을 떠나길 바랄때마다 방안에 가뒀어..


한번도 나는 내자신에게 미안해하거나 동정심을 가진적이 없었어..


내가 내자신을 아껴야..남도 나를 아껴주는것..


내가 나를 상처주지말아야..남도 나에게 상처주지 않는것..


내가 나를 속이지 말아야..남도 나를 속이지 않는것..


그런것들이..


내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법들이었어..


얼마전..


나는..


그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달려오느라 힘들었던일들 참고견딘 나니까 


행복할자격이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내자신에게 선물을 줬어..


나는 지금 그선물을 잃어버리지않고,평생 간직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어..


내가 내자신에게 선물해준거니까..


내가 받은 선물니까..


내꺼니까..


절대 잃어서버리면 안되거든..


누군가에게 뺏겨서두 안되구..


누가 내꺼 손대게 해서도 안되구..


훔쳐가게 해서도 안되는거야..


난 내 선물을 꼭 지킬거야..


내선물이 잘있는지 자꾸자꾸 확인하고싶어져..


그자리 그대로 잘있을때마다..


행복해서 미칠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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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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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의견을 갖는 것보다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에 귀기울이며, 양보하고 합의를 도출해내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 있다.
 
 이는 그 선전제로서 의견을 갖는다는 행위가 생각을 교환하는 것으로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적어도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일정범위의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의견을 갖음'이라는 행위는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둔 전술적인 행동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토론이라는 행위는 많은 경우 토론 외부의 제3자에게만 지향되어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예컨대 재판이라는 현실적인 판단 형식을 들어보자. 근대법은 왜 판단이라는 기능과 주장이라는 기능을 분리하였는가? "누구도 자기 자신의 판단자가 되지 못한다"는 격언은 왜 등장하였는가? 그것은 결국 주장하는 자는 판단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를 역해석한다면, 판단하는 자는 주장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로 싸운다는 행위- 정중하든 천박하든- 는 당사자들이 승복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런 문제가 있다: "차이를 존중하고 의견의 틈을 좁혀가자"라는 전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상대방을 만난다면 어떡하겠는가?  "자기 생각을 밝히고 싶다면 타인과의 차이를 먼저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바랍니다"라는 규범적인 말을 또 되풀이하겠는가? 우리는 그런 식으로 평행선을 달려왔던 대화들의 끝없는 목록을 이미 알고 있다. 인류가 자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군사적 해결 - 그리고 그 순화된 형태로서 정치적 투쟁- 이라는 수단에 의존해 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했듯이,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전쟁은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불가역하였을 타자의 의지를 무력화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문제 자체가 그것의 해결을 강요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의지를 투사하게끔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요건이 만족되는 것과 같이 자동적인 것이다... 
 
 이미, 말한다는 것은 결국 전술적인 행동임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라, 승리와 패배가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그리고 패배한 견해는 사라진다는 것을 삼켜야 한다- 그것은 승자에게 병합되든, 제3자들이 압도적으로 승자편을 택하든, 잊혀지든, 조롱당하든, 죽음으로서 사라지든, 어떤 형식을 택하든 간에 - '패배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니면, 만약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고 귀기울이며 양보해야한다는 것]이 더 이상의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정당화적 규범이라면, 당연히 그것은 '말한다'는 행위에 무전제적으로 삽입되어야 할 전제일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ceteris paribus '이라는 전제가 항상 삽입된다는 것과 비슷한 지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가? 그렇다면, 왜 그러한가? 혹자는 이를 민주주의적 요청에 근거하려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사실 웃긴 일이다: "민주주의는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할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야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적 요청에 근거한다", 라면, 별로 천착할 가치도 없는 또 하나의 순환 사례를 접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녕 왜 그러한가? 
- 이는 물론, '그러하지 않다'는 수사적 반문은 아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미 오래 전에 해답을 내려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늑대가 사라진 羊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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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그는 스스로가 비극에 대한 견해를 통해 제시한 진정한 비극성, 즉 문제에 고통받고 있는 채 세상에 의해서 이해받지 못하는 상태(28)를 어쩌면 자의에 의해서 지속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교착적인 반(反)영웅성을 어째서 붙잡고 있는 것인가라는 점에 있다. 
해답의 일부는 그에게 요구되는 여러 상반되는 요구가 상호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점에 있을 것이다. Okwonko 와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으로서 그의 강한 자존심, 즉 명예를 요구하려는 정신의 높음을 들 수 있는데, 그의 경우 그의 자존심의 중요한 원천은 그가 정식의 유럽식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토착 엘리트로서 식민 당국의 중견공무원으로 재직한다는 점에 놓여있다. 일부러 흑인 거주 구역을 벗어나 가내 고용인을 두고 있는 교외 고급 주택 지역 Ikoyi에서 거주하기를 선택하여다는 사실, 신분의 상징으로서의 자동차에 집착한다는 사실, 가족 부양과 학비 상환, 생활 수준 유지라는 재정적 부담을 굳이 한꺼번에 이행하려고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 모두 '이름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거부했던 사실로서 그의 이러한 자의식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이 만큼 높은 이름값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높은 물질적 부를 축적함으로써 지출을 감당해 낼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는 그러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도 또 그러한 능력에 도달할 수 있는 행동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문제를 직접적으로 분출시키는 것은 물론 행동을 미루는 그의 성격적 결함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가 수행하지 못하는 행동들의 목록은 어떤 조건들로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조건 -  예컨대 ‘존경받고 싶다면 자동차를 소유하라‘ '격조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Ikoyi 에 집을 마련하라’ 와 같은-들은 다시, 작품에서 다루어지
고 있는 특정 시기 (혹은 그 이상)의 나이지리아에 존재하는 토착 엘리트라는 계급으로부터 유래된다.  좀 더 분석적으로 접근하면, 이러한 조건들의 전건(前件, protasis)-예컨대 '존경받고 싶다면’은 이 계급에게만 허용되는 물질적/비물질적 희소 재화를 설정하고, 후건(後件, apodosis)은 그러기 위해서 이들이 만족하여야 하는 행동이나 상태의 목록을 구성한다. 말하자면  독립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여전히 내면적 근대화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이 특정 사회에서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명예와 자존심을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 사회적인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의 실행은 개인의 행동 - 그리고 그 행동을 상당 부분 결정짓는 개인의 성격적 구조-에 맡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겠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역시 사회적 차원의 조건들에 의해서 수행 가능한 것으로 위치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Obi의 행동이 거개 명예에 대한 요구, 이른바 인정투쟁
1)
으로부터 비롯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認定의 가능성이 그가 취득할 수 있는 교육정도와 능력주의에 입각한 신분으로부터 유래한다면, 그러한 한에서 그의 자의식은, 따라서, 토착 엘리트 계급의 자의식의 한계 내에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예컨대 하디 Hardy,T.의 작품군에서 관찰되는, 자기 교육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지만 신분적 한계에 가로막혀 좌절하는 주인공들보다 좀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나이지리아의 식민지적 근대에서 특이한 (그러나 이 시기 이곳에만 국한되어 출현한다고 볼 수만은 없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어디서 유래되었으며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토착 엘리트, 계급적 자의식 
Obi를 비롯하여 Christopher, Hon. sam Okoli 와 같은 토착 엘리트 집단은 본래 그 스스로가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권리에 기반하여 존재하는 자존적인 집단은 아니다. Things fall apart에서 작가는 전통사회에서의 특권 집단이 사실상 쇠락하고 반대로 이 사회에서 변두리에 위치했던 집단이 식민 주체와 협력하여 구조적 상승을 경험하게 되는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Khayyoom 1999, 125-127) 이보족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이보족은 역사적으로 식민화에 따른 정치적 지배관계의 설정사(史)에서 니제르강 유역의 다른 종족보다 이런 형태의 현지화된 협력자를 배출하는데 성공적이었다. (Simola 1995 86-87) 그것은 역사상 이 종족이 상대적으로 1) 부락연맹적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위가 희박했다는 점 2) 니제르 강 남부의 인구압력이 높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 3) 따라서 종족 내부의 부족간 경쟁은 식민 이전 역사에서도 일상적이었다는 점 4) 정치권력의 승계가 남계혈족주의 salic premogeniture or salic consanguity 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업적주의 meritocracy 에 입각한 집단지도 체제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 5) 그래서 부족내 개인의 업적 추구가 일상화된 종족이었다는 점 (즉 일종의 ‘개인주의’가 식민시기 이전 성립한 상태였다는 것)에 힘입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보족은 영국 지배 하에서 '가장 많이 변화하였지만 가장 적게 변했던‘ 종족이었던 것이다 (ibid., 89) 
이들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성립시킨 것은 UPU 와 같은 동향(同鄕)기반의 상호부조집단이다. 실제로 예로부터 부족간 경쟁이 흔했던 이보족 사회는 전쟁을 통한 패권 추구의 가능성이 식민통치하에서 절연되자 체제내 경쟁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ibid., 91)
2)
이러한 체제내 경쟁의 재료가 된 것은 20세기 초부터 조금씩 개방되기 시작하였던 관료직과 일부 고위 성직이었는데, 이렇다 할 민족자본이 부재하는 상태에서 (혹은 ‘민족’ 자체가 부재하는 상태에서) 이보족과 요루바 Yoruba 족을 비롯한 나이지리아내 주요 종족들은 이러한 행정직에 진출하는 것에 역량을 집중하였다. 그 구체적인 형태가 작품 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바와 같은 UPU인 것이다. 
'the importance of having one of our sones in the vanguard of this march of progress is nothing or axiomatic. Our people have a saying 'Ours is ours, but mine is mine." Every town and village struggles at this momentous epoch in our political evoutionto possess that of which it can say: "This is mine." We are happy that today we have such an invaluable posession in the person of our illustrious son and quest of honour.' (28) 
Obi의 귀국을 환영하는 위의 언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렇듯 부족에서 선발된 '총애받는 아들 favorite son' 이 자리매김되는 방식은 부족의 소유물 possession 이라는 생각이다. 이들의 위치는 그들 개인의 재능이 발휘된 결과인 측면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식민지 상황내에서 토착적 욕망의 집단적 표현의 결정체로서 위치 지워지고 있다. 기원상 출신 부족에 의존하고 있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인데, 먼저 이들을 교육하는데 들어간 비용을 상환함으로써 후속 세대를 양성할 재정적 책임을 지는 것과 (28) 'European post'를 획득함으로써 부족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개인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 (84)이다. 전통적인 분권적 구조 덕분에 이들에 대한 인신적(人身的) 통제는 물론 불가능하지만 여하간 이들은 본래 토착부족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한 전단 vanguard로 선발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요컨대 압축적 근대화의 도구인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Christopher 와 같이 자기 욕망에 충실한 세속적 엘리트가 아니고서라도, Obi와 같이 본래 대의에 충실했던 인물조차도 부족이익과 독립된 자신만의 독자적 이익관계를 인식한다: 
Obi admitted that his people had a sizeable point. What they did not know was that, having laboured in sweat and tears to enroll their kinsmen among the shining elite, they had to keep him there. Having made him a member of an exclusive club whose members greet one another with 'How's the car behaving?' did they expect him to turn around and answer: 'I'm sorry, but my car is off the road. You see I couldn't pay my insurance premium.'? That would be letting the side down in a way that was quite unthinkable. Almost as unthinkable was as a masked spirit in the old Ibo society answering another's esoteric salutation: "I'm sorry, my friend, but I don't understand your strange language. I'm but a human being wearing a mask.' No, these things could not be. (p.90) 
식민지 사회의 중간층으로 편입된 토착 엘리트들은 불가역적인 신분 상승을 경험한다. 여기에는 교외의 백인 주거 지역 Ikoyi에서 주택을 분양받는 일이며, 자동차의 소유, 혹은 심지어 자유 연애까지 포함될 수도 있다. 일단 권리로서 인정받은 다음에 이러한 이익들은 그들의 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짓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리고 Obi가 위에서 독백하듯이 한 번 신분 상승을 경험한 자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필요하다면 다시 하강하여 형제들과 섞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신분상승을 통한 구별 짓기 자체가 이들의 계급적 자의식을 결정하는 핵심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Things fall apart 에서 언급되었던 부락 장로연합체, 가면 쓴 신(神)들의 회합 ‘Egwugwu'가 언급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가면신들의 회합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것은 베버 (Weber, M.)적 관점에서 전형적이 합리적 정치화의 도구이다. 즉 희소한 자원을 권위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해당 사회 내에서는 완전한 체제였다. 게다가 이때 전거가 된 권위는 그 충실한 의미에서 합리화된 권위, 즉 업적주의 meritocracy 에 의해서 뒷받침된 권위였다. 식민 이전의 Umuofia 에서는 정형화된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는 개인의 업적을 보상해 주기 위해서 위계서열화된 작위(爵位, title) 체계가 존재했고 일정 작위 이상의 남성들만 이 장로연합체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Things Fall Apart 80) 한 편 이곳의 결정은 결코 뒤집어질 수 없고 의심될 수 없는 불가역적인 권능으로서 주민들의 생활에 개입했다는 점도 기억할 수 있다. 핵심은 어떠한 신민(臣民)도 이렇듯 거의 성(聖) 과 속(俗)을 나눌 정도의 심대한 신분 격차를 만들어내던 이 조직에의 가입자가, 회합에서 말해지듯 육체를 가진 신격(神格)이 아니라, 정말은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이들은 가면을 씀으로서 신내림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서 자신들이 필부(匹夫)의 계급과 다름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되었듯 Obi가 ‘사실은 보험이 안 되어 차를 몰지 못 한다’고 고백하는 일이란 가면을 쓴 유력자가 가면을 벗고 자신은 사실은 인간임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일이다. 즉 그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가면을 쓴 자도 쓰지 않은 자도 그가 사실은 인간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간임이 드러나면, 가면 쓴 신들의 회합에 권위적 정당화 작업을 유보하고 있는 그 사회는 근본이 뽑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식민지 대중의 욕망의 현현(顯現)으로서의 토착 엘리트가 자신도 사실은 식민지 소시민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생활을 이어갈 동력을 얻는 식민지 사회를 동요하게 할 뿐인 가치파괴적인 행위이다. 게다가 그것은 구별짓기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하던 계급적 이익에 역행할 뿐이다. 그렇다면 Obi가, 그를 그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준 토착민들과는 독립적인 계급 이해를 가지는 자족적인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1) 認定鬪爭, Erkennungskampf. (Struggle for Recognition) 헤겔 Hegel,G.F. 은 「정신현상학 Phenomeologie des Geites 」의 「정신 Geist 」장 「주인과 노예 Herr und Sklave」절에서 이 개념을 처음 도입한다. 객관적 정신으로 종합된 주관적 정신은 대자적 對自的 외화 外化 로 상승하기 위해 다른 객관적 정신에게 욕망되는 것을 욕망한다. 단,, 다른 객관적 정신을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우선되는 욕망-됨을 요구하는 객관적 정신들은 한 쪽이 다른 쪽을 욕망하되 욕망되지 않는 다음 단계의 종합을 위해 모순에 놓여지게 된다. 이때 타자의 욕망되기 위해 자신에 대한 욕망을 지양한 정신이 즉자적이 욕망에 머물러 있는 정신에 대해 욕망-됨을 우월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이 「주인」이 된다. 이 테마는 그의 역사철학에서 반복되면서, 지배를 강요하기 위해 궁극적인 자기애, 즉 생명에 대한 욕망을 극복한 전사계급의, 자기애 단계에 머물르고 있던 농노계급에 대한 승리를 개념화하는데 동원된다. 즉 지배계급은 생명을 ‘이름’보다 중히 여기는 피지배계급에게 자신에 대한 ‘인정’을 강요할 수 있었다.  시민사회가 도래하면서 비로소 서로 상대방을 동등하게 욕망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타자에 의한 욕망됨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호인정의 종합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개념은 맑스 Marx, K.의  「정치경제학비판 요강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에서부터 ‘계급투쟁’ 개념의 예비적 개념으로 원용된 바 있다. 


2) 이 점이 예컨대 이미 민족국가가 형성되어 있던 지역단위에 식민통치가 적용된 것과 비교해 그 결과나 식민지 내/외의 사후적 평가가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으로 보인다. Anderson 1983은 20세기의 많은 신생국가들이 식민시기 이전 역사적으로 전혀 정치적 문화적 '민족‘을 형성한 적이 없는 반면, 이러한 국가들에서 독립 이후에 민족주의가 비로소 민족을 ’창조하는‘ 동력으로 부름받고 있음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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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각주: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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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al hypotheticals, 'authenticated' 
  
보충적 의사해석. 
P “의사내용의 합치가 있었더라면/ 실제와 다른 상황을 전제하지 않았더라면 R 약정(합의)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당사자의 태도“
  
착오취소_‘중요부분’
P “의사와 표시가 일치하지 않음을 알았더라면  /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착오가 없었더라면 R 그리 의사표시하지 않았을 정도의 ‘중요부분’”
  
계약_‘주된 급부’
P "그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더라면 R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정도의 주된 급부“
  
추상적 경과실
P "사회생활상 통상 요구되는 정도의 주의를 다하였더라면 R1 일어나지 않았을 손해를 R2 방지할 주의를 다하지 못함“
  
이행이익
P “계약(법률행위)이 이행되었더라면 R 당사자가 놓였을 지위”
  
가정적 인과관계
P "자기 행위가 없었더라도 C 사후에 발생할 사정에 의해 R 발생하였을 손해“
비유형적 인과관계
P1 "기준행위가 현존하였더라면 그리고 P2 독립행위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R 통상 일어나지 않을 결과가 일어난 경우"
 
- 더 찾아낼 것. 
 
Theme pursuable
  
민법상의 假言命題 / 가능세계의미론 possible world semantics / 반사실적 조건문 counterfactual conditionals 해석
  
Points of argumentation
  
- 왜 가언명제를 쓰는가, 도대체? 
  -이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공유할 것이다.
  - 현존하지 않는 것이 왜 법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가? 
  - 아마도, '어쨌든 무엇인가는/ 누군가는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복수심리.  혹은 원한감정.
 
아니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있기를 바라는 前返省的 감상주의.  
 
- hypothetical 해석의 근거 가능세계는 무엇인가? ‘the most immediate world possible'?
- ceteris paribus 조건이 적용되는가?
- mutatis mutandis 조건이 적용되는가?
- conditio sine qua non? ┓P → ┓R 관계?
  
-입증. hypothetical 이 충족되었다는 [사실]? 
 
주요사실이 될 수 있는가? 
간접사실이 있을 수 있는가? non-immediate facts which, if fullfilled, shall suffice to set forth a prima facie case? 
보조사실조차 있을 수 있는가? 
반증은 가능한가?
"R would have entirely been possible even had P not been qualified"? 
 
Or, "R is not feasible anyway" 
 
간접반증은 가능한가?
"R would not have happend had P not been qualifed" would not be ascertained had Q not been quailfed; and, Q, is not qualifed."?
 
Or regression (infinite):
"""R would not have happend had P not been qualifed" would not be ascertained had Q not been quailfed" would not be ascertained had S not been qualified, which again would not be ascertained had V not been qual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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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 일반적인 그들이, 법조계의 業況과 자신이 法曺徒弟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은 기실 당연하다. 이것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법이 그들에게 줄 것이라고 기대되는 바와, 법이 실지로 무엇인 바가, 주관적으로 모순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이 논증되면 충분할 것이다: 
 1) 근대세계는 우연하게도, 자본주의와 동시에 법을, 스스로를 규율하는 주된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것.  2) 따라서 근대법의 프렉티셔너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다른 사회들 혹은 다른 가능했던 사회들이 그들의 규율자에게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우월한 생활보장이 주어졌다는 것. 3) 그래서 고등교육제도로서의 법학은, 學의 성격과 독립적으로, 강렬한 '생활욕구'를 가진 인적자원들을 다른 분과학문보다 많이 흡수하게 되었다는 것. 4) 그러한 경향은 법학 분과내의 내부관계에서의 상대적인 분포에서도 관철된다는 것, 5) 그런데 법학의 존재형식은 계통분류학과 유사철학적 담론의 잡종이라는 것. 6) 그리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생활지향적인 관심지향과는 거리가 먼, 심지어 모순되는, 경향이라는 것. 
 
 1)에 대해서는 베버의 연구가 고전적이다. 그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비판담론은 대개 이런 형식으로 근대세계와 법의 관계를 유형화해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1.1) 세계의 세속화 1.2) 근본가치의 분화 및 일원적 가치로의 환원가능성 혹은 통합가능성이 소멸됨 ('악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악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름답다!) 1.3) 세속세계의 규율원리로서 '합리성'의 압도적인 등장 1.4)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대한 요구와 법의 내재적 형식간의 친화성, 1.5.) 진화선택적으로 기세를 더해간, 법적 규범원리와 행동방식의 우점종화 (cascading domination!). 
 
 2)야 뭐 당연하다. '恒心은 恒産者에게만 있느니'라고 하시던, 성현 말씀. 예컨대 쏘비에트에서도 黨員들을 필요로 했다는 것. 
 
 3)과 4)에 대해서도 그다지 덧붙일 말은 필요하지 않다. 다만 이를 좀 더 경험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하다. 이러한 계기에서 사회적으로 선택된 학은 - 굳이 법학뿐만이 아니라- 내재적 성격과는 독립적으로 '매개'화되는 경향이 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 학을 함으로써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얻어진다면 그 학의 내용이 무엇인과는 나와는 관계없다는 성향이 형성된다는 것인데, 그것도 아주 대중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오늘날 법률가의 자격요건을 周禮와 詩史에 얼마나 능통한지로 국가가 정하고 이에 따라 四書와 二十四史를 시험과목으로 지정하되 응시요건을 국내 사년제 종합대학에서 한문학과 역사학을 일정학점 이상 이수한 자로 제한한다 하더라도 지금과 그다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5)에 대해서는 복잡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지만, 특히 판덱텐 체계를 기본으로 하는 법체계가 있는 나라라면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의 전형적인 서술을 인용한다: "민법에서 정하는 규율을 배치하는 방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바로 총칙규정과 그 이외의 규정들을 나누는 사고방식임을 알 수 있다. 총칙에서는 민법에서 정하고 있는 제도 전부에 적용이 있다고 -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 생각되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또 채권총칙에서는 채권이라면 어떠한 것에든 적용이 있을 것을 -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 예정하고 있는 규정들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ax + bx = y라는 식을 x(a+b)= y로 만들어 공통한 x 를 추려내는 것이다..."
 또 하나, 예컨대; "법이 할 수 있다 können 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하여도 된다 dürfen 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권리 자체의 物的인 性質 또는 內容과 권리자의 다른 사람에 대한 人的인 義務를 구별하는 민법의 기본적 사고 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할 수 있다'와 '하여도 된다'를 구분하는 것은 생활관계의 법적 처리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측면을 따로 규율하기 위한 필요에서 인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골치아픈 것에 대처하기 위해, 그래서 독일의 법대생들도, 풍문으로는, ' 깔끔히 다린 폴로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 편안한 느낌의 가죽신발. 여기에 매끈하게 도금된 안경을 코 위에 얹고'   하나같이 붉은 색의 두꺼운 법전을 한 쪽 품에 끼고 다닌다는 것이다. 
 
6)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 힘들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이 논증의 핵심 연결고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인식의 지평을 넘어간 것은 있다. 특히 자신의 직관의 한계가 그러한 한계에 해당한다. 요컨대 그것은 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주의 끝에 선다면 어떤 우주가 보이는가와 같은 질문을 야기한다. 
 그래서 다만 이것만 지적해 두고 마무리짓도록 한다. 나에게는 분류학적 지향 및 논리연결을 설정하려는 경향과, 강렬한 생활 욕구- 특히 매일매일을 즐겁게 발랄하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그러한 것- 이 개인적인 수준에서 모순되어 보이는, 그러한 경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없다. 특정물도그마를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가 담보책임을 법정책임으로, 또 오직 법정책임으로만, 이해하는 견해와 필연적으로 연결됨을, 또 그것은 '특정물의 性狀은 효과의사 및 행위의사의 내용이 되지 못한다'는 특정한 전제를 깔아야만 한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이야기 해서는 왜 안 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단지 그런 것은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 뿐이다. 그것도 진짜로 즐거워하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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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예술적대자('바리새인')들은 예술을 조금도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현대예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면 반대로 현대예술을 단지 너무나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저자인용]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조작당한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제쳐놓은 것은 사실 현대인의 내밀하고 깊은 곳에서는 가장 잘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낯설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사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것과 너무 친숙해 있기 때문이라는 프로이트의 금언과 유사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아도르노, '미학이론')
이런 의미에서 예술적대자들은 그들의 취향(taste)이 어떠하다는 식으로 파악될 수는 없다. 그들의 계획은 훨씬 능동적인 것이며, 그들의 거부는 예술의 문제나 미학이라는 좀더 제한된 영역을 궁극적으로 초월하는 사회적 의미를 가진 제스쳐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예술작품에서 예술적대자들이 증오하고 혹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잡아떼는 것이란 물론 예술의 최고 사명, 즉 예술이라는 '좌절된 약속'의 형식 속에 있는 '행복에의 약속' - 이러한 약속은 행복이 현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행복의 이념을 생생하게 간직한다- 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나 유토피아적 실현에 대한 이러한 궁극적 관계가 '원한감정을 가진 인간'의 정열 속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다른 사회 영역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저자인용] "인간의 권리"라는 것에 담겨 있는 의미는 권력을 가지 않은 자에게도 행복을 약속해주는 것이다. 기만당한 대중은 계급이 있는 한 행복의 약속이 적어도 보편적 약속으로서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예감하기 떄문에 분노를 터뜨린다. 그들은 조롱당했다고 느낀다. 행복의 관념이 절실할수록 그들은 행복의 가능성이나 행복의 이념을 더욱 거칠게 추방하고 부정해야만 한다. 대다수에게 행복이 거부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선가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들은 행복에 대한 그들 자신의 동경을 재차 억압해야만 한다. 그러한 억압을 되풀이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 약속된 땅을 상기시키는 낯선 것이나 섹스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움이나 잡혼을 상기시키는 저주받은 동물이건 간에 -은, 그것이 그 자체로는 아무리 불행한 것이었을지라도, 고통스러운 문명화 과정을 결코 완성시킬 수 없었던 문명인의 파괴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발작을 일으키듯 자연을 지배한 자들은 유린당한 자연에서 "무기력한 행복"이라는 도발적 이미지를 발견한다. 힘이 없는 행복이라는 관념은 그것만이 비로소 행복일 것이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 -, '계몽의 변증법')
...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렇듯... 행복의 약속에 대한 증오감이라는 본래의 관념을 확장한다. 이러한 확장 가운데에는 예전의 공동체나 집합성같은 덜 소외된 상태로 상상한 것에 대한 질투가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의 "수렴이론", 즉 할리우드와 뉴딜의 미국과 나치 독일이 친족관계에 있다는 이론을 추인하게 된다. 나치 사회의 반유대주의자를 겉보기에는 좀 더 무해하게 보이는 문화산업의 적대자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양자 사이에 좀 더 깊은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양자는 즉 계급사회가 만들어낸 깊은 '원한감정의 부정적 구현' 이라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가치평가 또한 자신의 좀 더 근본적인 기능을 이러한 진단 속에서 발견하다. 이 기능은 바로 계급에 의해 일그러진, 또한 점점 더 관료제적 통제를 지향하는 사회질서 속에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불안정하고 죄의식으로 가득 찬 사회적-개인적 약속이 갖고 있는 기능이다..."



-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김유동 譯, '후기 마르크스주의 Late Marxism'(1990), Ch.2.5. "서사적 계기로서의 문화산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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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을 어디에다 걸어두어야 좋을지 모르겠어, 어느 당(黨), 어느 그룹, 어느 세력에 걸어야 할지. 왜냐하면 누구나가 하나의 수치스런 법칙을 인정하며, 모든 것이 이 법칙에 의해 요리되고 있으니까 말일세. 그리고 우리들은 언제나 희생자의 편에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다 할 결과는 없네. 희생자는 아무런 길도 제시하지 않는 걸세!"
"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점일세." 프리들이 소리쳤다. "저 희생자들, 수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전혀 길을 제시해주지 않는 거야! 게다가 시대는 살인자에게 편리하도록 변해가네. 희생자는 희생자일 따름이지. 그것으로 전부야. 나의 부친은 도르푸스 [1892-1924, 오스트리아 수상, 反나치로 암살됨] 시대의 희생자였고, 할아버지는 제국의, 나의 형제들은 히틀러의 희생자였네. 그렇지만 그것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거야. 내가 말하는 것을 알겠나? 그들은 모두가 벽 앞에 세워져 총살당하고 치어죽고, 쓰러져갔을 따름이야. 거창한 것을 생각지도 의도하지도 않는 소시민들이 말이지. 그런데 그중의 불과 몇 사람이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해냈네. 예컨대 나의 할아버지는 다가올 공화국을 생각하셨지. 그렇지만, 말 좀 해보게. 무엇때문이었을까? 그들이 죽음이 없었다면 공화국이란 올 수 없었겠나? 나의 부친은 사회민주주의를 생각했지. 그렇다면 말 좀 해보게. 누가 부친의 죽음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선거에서 이기려고 애쓰는 우리의 노동당이라고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네. 이기기 위해서 죽음이 필요한 것을 아닐세. 그것은 아니야. 유태인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희생자에 지나지 않았어. 그렇듯 수많은 희생, 그렇다고 해서 그 희생이, 오늘날에 와서 유태인도 인간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있었던 것은 아니잖은가? 늦은 감이 있네. 그렇게 생각지 않나? 정말로, 희생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그런 점을 엄밀하게 이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네. 어차피 이런 희생자들은 사물의 정체에 대한 형안을 갖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피해를 입는 자는 아무도 없네. 그렇지만 도대체 그런 형안 炯眼이 무슨 소용이 있나. 도대체 이 땅에서 죽여서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나?!..."
... 나로서는 이 세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 술을 마시고 지껄이며, 토론을 벌이는 밤마다 우리는 곧잘 이런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이 세계가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나는 프리들에게, 나는 무엇이든지 이해를 하는데 그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다가도 나 역시 문득 아무것도 알 수 없이 되며, 이번에는 이 사내와 어울려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더구나 다른 사람들과도 공존하기 한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많은 점에서 일치하지만, 가족을 논거의 방패로 나거는 프리들 같은 사나이, 혹은 예술을 내세우는 슈테켈 같은 사나이와는 결코 한 세상에 어울려 살 수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러와도 나는 때때로 공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다음 번 결정을 내릴 때, 그도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인지의 여부를 도대체 내가 깨닫기라도 했단 말인가? '뒤를 돌아보는 것' 이라면 우리들은 대체로 동의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래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나는 곧 말러에게서도 프리들에게서도 떨어져나갈 것이다. --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때 가서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고 무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간부터 학문이란 그에게 일종의 공포의 근원이 되었다. 그것은, 그가 학문 안에서 그릇된 길로 접어들어 너무나 멀리까지 걸어가서 그 끝에서 파국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러저런 일을 조금씩 배워서 막벌이꾼이 되는 것, 한 끼의 따뜻한 식사를 위해서 어린 학생들의 공부를 보아 주는 것뿐이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여러 인간들이 한 인간에 대해 과오를 범한다는 것, 인간이란 그 자체가 모름지기 인간들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겐 상처를 받아 우울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 누구나가 타인에 의해 죽고 싶도록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체험뿐이었다. 또한 바로 인생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상심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임에도, 누구나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대한 체험이었다... 이제부터 그는 이같이 높이 비상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세계를 걸고 있는 논리 그 자체에는 부딪히지 않으리라... 
... 그렇게, 시가지가 끝나는 곳. 웅덩이가 있는 곳. 조약돌의 잔재가 가득 찬, 모래 걸르는 채가 놓여 있고, 발밑에서 모래의 사박거림이 멈추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잠시 주저앉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도 좋으리라.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이 과거에는 과거대로, 현재에는 현재대로 있는,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에 대해 근원을 추구하기를 포기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너를 감동시키는 막대기 하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보리수와 라일락 수풀은.......? 아무래도 너의 가슴에 와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릴 때의 비밀도, 복구된 집도. 그리고 치글툰 城의 탑도, 갇혀 있는 두 마리 곰도, 연못도, 장미도, 노란 등꽃 가득 핀 정원도. 이 모든 것이 가슴에 와닿지는 않는다. 길을 떠나기 전에, 모든 출발에 앞서서, 아무런 감동 없는 이 회상 속에서 우리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한 가닥 깨우침의 빛을 가져다 주는 최소한의 것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청춘도, 청춘의 무대가 된 도시도 거기에 속해 있지는 않다. 오로지 극장 앞의 한 그루 나무가 기적을 보여줄 때, 횃불이 타오를 때에야, 비로소 나는 마치 바다 속의 물처럼 모든 것이 고르게 뒤섞이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어린 시절의 몽매함과 극도의 정열 속에 싸인 구름의 비행이 뒤섞이는 것을. 노이엔 광장과 그곳에 서 있는 바보 같은 기념비가 유토피아를 향하는 눈길에 뒤섞이는 것을. 그 옛날의 사이렌 소리와 고층 건물에서 나는 엘리베이터의 소음이, 그리고 말라빠진 잼 빵과 대서양의 바닷가에서 내가 깨물었던 자갈의 맛이 뒤섞이는 것을. "



-잉에보르크 바하만 Ingeborg Bachmann,
"삼십세" Das dreissigste Jahr (1961) 中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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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이 있다고 생각하면 식모가 있고, 책상이 있다고 생각하면 요람이 있고, 책과 흑판이 있다고 생각하면 바늘, 실이 보이는 상태를 상상해 보라고 하면서, 신학이나 철학상의 묵상에 잠겨 있을 때 누가 어린애의 울음 소리, 이를 달래는 유모의 노랫소리, 식모들의 소란한 조잘거림에 참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어린애의 냄새나는 배설물을 보고 참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부유한 사람들은 상관 없겠지만, 가난한 철학자가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더군. 만일 철학자가 돈을 벌려고 하고 살림 걱정을 하게 된다면, 신이나 철학에 전념할 수가 없다는 것이야..." 




-아벨라르두스 / 엘로이즈 ,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서간" (circa. 1120)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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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옛날 미시시피 강변에 담소아 (膽小兒)와 학빈(鶴彬)이라는 두 아이가 살고 있었다. 담소아는 그 이름과 달리 담이 큰 아이였다. 즐겨 도당을 만들어 우두머리가 되고, 성경(聖經)의 교리에 깊은 회의를 품고 앙앙불락하였다. 이 때는 전쟁도 없었던 때였기 때문에 생활은 지루했다. 한편 학빈, 학빈(鶴彬) 이 아니라 학빈(虐貧)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학대했고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을에 와서 아이들과 노는 것이 집에 있는 것보다 좋았다. 두 아이는 늘 같이 어율렸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두 아이의 풍운아로서의 기질을 눈치채고, 자기 자녀들이 그들과 사귐으로써 현 사회체제에 대해 불온한 개혁사상을 가지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담소아는 아이들을 영솔하고 해적놀이를 하는 동안 대인물들이 별 수 없이 맛보게 되는 경험을 겪게 되는 것이었다. 소인들은 거사의 중요한 대목에서 수령을 배반하는 것이다. 거사란 다름이 아니라 해적놀이였다. 담소아는 이 놀이 속에 그의 동포의 근본적 존재 양식을 직관하였던 것이다. 나이프, 밧줄, 폭동, 빼았은 보물의 맛- 거기에는 용기와 지혜, 모험과 진취, 삶의 기쁨과 투쟁의 장쾌함이 있었다. 의적(義賊)이니 하는 병적인 명분을 붙이지도 않았다. 재물 때문이라면 누구나 죽이는 것이었다. 눈썹 하나 까딱 안하고. 그는 이와 같이 자기 부하들을 훈련시키려 했는데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착생활에 나약해진 해적들은 브르조와가 돼 있었던 것이다. (브르조와란 小人의 佛譯인데 여러 뜻으로 사용된다- 作者註.) 그래서 그의 해적단은 비운을 맛보게 되었다.
바다에서 웅도를 펴지 못한 그는 로빈훗에 되기를 결심하였다. (로빈훗은 임꺽정에 해당하는 義賊- 作者註.) 그리고 이번에는 그 동지로 묘령의 가인을 택하였다. 마을에는 아무도 들어가보지 못한 동굴이 있었느데 그는 그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전설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담소아는 동굴에서 이상한 인물을 발견하고 그 뒤를 밟았다. 그 인물은 자꾸 달아났다. 담소아는 담대하게 뒤를 쫓았다. 동행한 가인이 그 불가함을 들어 만류하였으나 담대한 담소아는 굽히지 않았다. 급하게 쫓겨서 더 피할 수 없이 된 그 인물은 달아나면서 애원하였다. 
"나를 쫓지 말아 주시오. 나를 보면 당신은 불행해질 것이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기승한 담소아의 귀에는 그것이 잔꾀로 들렸다. "빨리 네 모습을 드러내라 이놈아." 이것이 담소아의 대답이었다. 가인은 또 한 번 만류했다.
"소첩이 듣건대 군자는 위험을 가까이 안한다 하였고, 인외(人外)의 이(異)를 넘보지 않는다 하였는데 낭군은 깊이 살피소서."
이같이 말하였다. 담소아는 한번 크게 웃고 "이 몸이 아직 천지간에 두려운 것을 모르는데 어찌 이 기회를 놓치리요." 이같이 말하고 쫓기를 더욱 급히 하니 마침내 그 인물은 힘이 진하였음인지 동굴의 벽에 낯을 가리고 뛰기를 멈추었다. 담소아는 쾌히 웃으며 덮치어 놈의 덜미를 잡아 일으키니 이목구비가 모두 없는 달걀귀신이었다.
동굴에서 돌아온 후로 담소아는 몸져 눕기를 여러 날에 병은 쾌하였으나 사람이 달라졌다. 매사에 조심스러워지고, 지난 날의 호쾌히 놀던 온갖 놀이를 경망스럽다 하여 물리치고 교회에 부쩍 마음을 두어 목사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이리하여 판사 (아마 判書의 誤傳일 것임-作者註)의 여식인 예의 동굴모험시의 동반 가인을 아내로 맞아 복된 일생을 마쳤다 한다. 
한편 학빈은 동지의 이같은 변모에 탐탁치 못한 마음 누를 길 없어 
"담소아는 참으로 담소아여."
,라 하였는데, 이는 벗의 이름을 두고 비꼰 말이 분명했다. 그 후 학빈도 돈있는 과부와 인연을 맺어 학빈(虐貧)을 면한 처지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 아이들 성명에 얽히는 팔자는 갈 데 없는 것이여" 한다. [...]"


-최인훈, "西游記"(1971)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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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그대의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바빌론이여? 
지금은 어디 있는가?
그 무시무시한 느부갓네살과 용맹한 다리우스와 
그리고 그 유명한 시리우스는?
지구가 큰 힘으로 움직여 그들이 사라져 간 것처럼
명성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이들은 썩어 갔도다. 
호사스럽던 율리아여, 궁정은 지금 어디 있느뇨? 
카이사르는 떠났도다!
그대 온 세상보다 더 거칠고 위대하던 카이사르여. 
[...]
마리우스와 물욕을 모르던 파브리키우스는 지금 어디에?
어디로 갔는가, 
파울루스의 그 고귀한 행동과 기억할 만한 행적은?
마왕 필리피카의 불길한 소리는 어디에? 
키케로의 천상의 소리는?
시민을 위한 평화는 어디 있는가? 
모반자들에 대한 카토의 노여움은?
레물루스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로물루스는, 또 레무스는 어디에?
지난날의 장미는 이름뿐, 단지 그 이름뿐. "


- 베르나르 드 물레, '세상에 대한 경멸에 대해'
Bernardi Morlanensis, "De contemtu Mu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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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일반적인 패턴은 이러하다.
신혼의 단꿈에 젖은, 교육을 많이 받은 행복한 젊은 부부가 함께 보금자리를 꾸민다.
이들의 보금자리는 대개 비좁은 셋방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이제 돈을 모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둘이 살아도 비용은 혼자 살 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돈을 모아서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꿈의 보금자리를 사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맞벌이를 하며 직장 생활에 전념한다.
두 사람의 수입은 늘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입이 늘면서..

... 수입이 늘어가게 된 두 사람은 이제 꿈의 보금자리를 사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새집이 생기면 이른바 재산세라는 세금이 또 붙는다.
이어서 두 사람은 새 차를 사고, 새 가구와 살림살이를 사서 새집을 단장한다.
그러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갑자기 부채 부분이 은행 융자와 카드 빚으로 꽉 차 있다.

두 사람은 이제 <쥐 경주>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곧이어 아이가 태어난다.
두 사람은 더 열심히 일한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된다. 수입이 늘면서 세금도 는다. 소위 말하는 과세 표준이다.
우체부가 신용 카드를 배달한다. 두 사람은 그것을 사용한다. 쓸 때는 기분이 좋다.
대출 회사는 전화를 걸어 그들의 최대 <자산>인 집이 가치가 올랐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상계 대출>을 제안한다.
두 사람의 신용 상태가 아주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회사에서 대출을 받아 신용 카드 빚을 갚음으로써 고율의 소비자 대출을 해소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게다가 주택 융자금의 이자는 세금 감면의 대상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다. 그들은 고율의 신용 카드 빚을 갚는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신용카드 빚이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소비자 대출을 주택 융자로 돌렸다. 주택 융자금 상환 기간은 30년이기 떄문에 당장의 지출은 줄어든다. 아주 잘한 일인 것 같다.
이웃 사람이 전화를 걸어 같이 쇼핑을 가자고 제안한다. 세일 기간이라는 것이다. 돈을 절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두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절대로 아무 것도 안 사면 돼. 그냥 구경만 하면 되지 뭐"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신용 카드를 찾아 지갑에 넣는다...

... <쥐 경주>에 빠진 사람들의 삶은 이런 것이다. 수입 증가와 함께 지출도 늘어서 자산에 투자할 수가 없다.
그 결과 융자금과 카드 빚과 같은 부채는 자산보다 훨씬 많게 된다
... 중산층은 계속해서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이들의 주요 수입은 임금에서 나오며, 임금이 높아지면 세금도 높아진다.
그리고 임금이 늘어나면 같은 비율로 지출도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쥐 경주>라는 말이 성립된다.
이들은 <주택>을 자신의 주요 자산으로 여기면서 수입이 나올 수 있는 자산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 다행히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뮤추얼 펀드를 사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투자 증가는 미국 주식 시장의 엄청난 반등을 낳았다.
갈수록 더 많은 뮤추얼 펀드가... 인기를 얻는 것은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에 투자하는 부류는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내고 융자금을 갚느라 정신이 없다.
이들은 또 아이들의 학자금과 카드 빚도 갚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투자하는 법을 공부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펀드 매니저의 전문성에 의지한다.
이들은 <재산 분산화>의 교리를 믿게 된다. 즉, 안전하게 살라는 것이다. 위험성을 피하라는 것이다.

... 정말로 비극적인 것은 초기에 돈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중산층이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안전하게 사는 이유는 돈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자할 자본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부채만 잔뜩 있고 수입을 창출하는 진짜 자산은 없다.
대개 이들의 유일한 수입원은 직장에서 받는 급여이다. 이들의 삶은 전적으로 고용주에게 의존한다.
그래서 정말로 <평생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이런 사람들은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
이들은 다시 안전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열심히 일만 하면서 세금만 잔뜩 내고 빚에 허덕이기 때문이다. "



-로버트 기요사끼, 샤론 레호트;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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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안을 하나 할께, 게르다. 

태도 (Moral) 에서도 기체의 운동 이론과 똑같은 일이 진행된다고 가정해보자구. 

모든 것이 규칙없이 혼란스럽게 날아다니고 각자가 원하는대로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부터 실제로 생겨나는 것은 여기서 생겨날 리가 전혀 없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것이라구. 

희한할 정도로 일치하고 있어! 그러니까 특정한 양의 이념들이 현재 혼란스럽게 날아다니고 있다고 가정해보자구. 

그것들은 가장 개연성있는 어떤 중간값을 내놓겠지.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이 모든 것에서 우리의 개인적, 개별적 움직임은 전혀 중요하지 않지. 우리는 오른쪽 아니면 왼쪽으로, 높거나 아니면 낮게 , 신식 아니면 구식으로 또는 대략 아니면 용의주도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 

그것은 중간값과는 아무 관계도 없지. 신과 세계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이지 <우리>가 아니라구!"

-로베르트 무질 Robert Musil,


"특성없는 남자 Der Mann ohne Eigenschaften", 2부, 103장. 


"...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젊은이는... 쉬지 않고 사방으로 그의 사상들을 보내지. 

그러나 그의 주변에서 반향을 일으킨 것만이 다시 그에게 되돌아와 응집되며, 

그 밖의 모든 다른 사상은 공간 속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거야!... 

(이리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사람의 평범하고 비인격적인 생각은 저절로 강화되는 반면 비범한 생각들은 사라지면서, 

그래서 기계적 결합처럼 안전하고 점점 더 평균적으로 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누구나 할 것 없이 결국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같은 책, 2부,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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